24절기 중 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우(穀雨)는 '곡식이 잘 자란다'는 뜻을 지닌 절기입니다. 겨울 내내 얼었던 대지에서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었다면, 곡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잎과 줄기가 자라나 푸른 대지를 이룹니다. 봄 햇살에 영글어가는 촉촉한 곡식밭의 모습에서 생명의 활력과 미래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 농경민족에게 곡우는 한 해 농사의 꿈과 희망이 가득한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조상들은 이맘때가 되면 밭과 논의 잡초를 제거하고 보리, 밀 등 곡식의 생육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습니다. 밭갈이와 김매기 등 본격적인 봄 농사일에 착수하기도 했지요. 한해 농사의 첫 결실을 맺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건강한 곡식이 자라나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먹을거리의 근본이 곡식에 있었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세시풍속과 의식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농부들은 곡우가 되면 논둑에 모내기 풍년을 기원하는 기둥을 세웠고, 제주에서는 이 무렵 들녘에 영그는 보리밭 풍경을 마주하며 대지의 생명력을 읊기도 했습니다.
농촌 공동체에서는 곡우를 전후해 '모내기 고사'를 지냈습니다. 마을의 큰 우물가나 공터에서 제물을 차리고 농사의 풍작과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었죠. 이는 공동 노동력이 필요한 영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농부들은 고사 후 서로 품앗이를 하며 모내기에 돌입했습니다.
이처럼 곡우는 본격적인 봄 영농과 풍년 기원의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곡우 들녘의 싱그러운 모습은 농부들에게 단비 같은 희망이자 위안이 되었습니다. 고된 겨울나기를 하고 봄 내내 농사일에 고생한 보답이 이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궁핍했던 조선시대에도 선비들은 봄 들녘의 곡식 새싹을 보며 생명의 기운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벼슬길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 사림들도 소박한 농가에서 곡우의 정취를 만끽하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시인 이현보의 '곡우가'에는 "곡식 자라나 푸르건만, 시골 농가는 궁핍하여, 흰 돛단배나 바라보며 산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농민의 삶이 넉넉지 못했지만, 봄날 푸르른 곡식밭은 그들에게 희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 역시 곡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봄이 오래되어 뜨거운 기운이 지나쳐서 새싹은 점점 자라나 목초들이 무성해질 적에 이른다." 곡우가 되면 대지가 생명의 새 기운으로 충만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곡식이 움텄다"는 뜻으로 곡우 절기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곡우는 농경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생명 순환 과정에서 꿈과 희망을 읽어냈습니다.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옵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농산물 브랜드 이름이 '쌀'이라는 자부심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도, 대한민국 정부가 매년 '곡우(穀雨)영농가족한마당' 행사를 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달리 산업화가 이뤄진 현대에는 봄밭의 곡식 풍경을 자주 목격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농촌을 찾아가면 여전히 살아 있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봄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밭과 모내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전통 농경문화의 손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곡우가 되면 전북 고창의 푸른 보리밭길을 걸어보세요.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황토 내음 가득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인근 밀밭에서는 춤추는 듯 출렁이는 물결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경기 안성에서는 보리 수확체험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풍년의 계절, 곡우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전국 각지의 드넓고 푸른 들녘과 촉촉한 농촌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은 잎과 줄기를 뿜어내며 활기차게 자라나는 곡식밭 풍경 앞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로움과 대자연의 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바람에 실린 곡식 내음은 마치 대지의 생기 가득한 숨결 같습니다.
이제 곡우의 따스한 기운 가득한 봄날, 우리 농촌 곳곳을 찾아 걸음을 내디뎌 보는 것은 어떨까요? 출렁이는 곡식밭 길을 거닐며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농부들의 수고와 땀방울에 경의를 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바랐던 풍년의 절기 곡우, 그 뜻깊은 의미를 이어받아 자연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봄의 마지막 여정에서 맛보는 생명의 찬란한 기쁨과 희망이 우리 가슴 가득 젖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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